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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ood #travel #sports #news #may #tuesday

‘상실’의 ‘기쁨‘이라니. 상실은 극복이나 대처의 대상이 아니었나. 상실해도 ‘괜찮다’가 아니고, 그러니까 상실해서 ‘기쁘다’니. 이 책은 순전히 제목 때문에 장바구니에 담겼다. 원제는 The Beauty of Dusk. 직역하면 황혼의 아름다움이 될텐데, 이런 제목은 매력이 없다. 여기서 'dusk'는 ‘나이듦’과 ‘흐려지는 시야’를 의미하는 중의적인 단어로 쓰였지만, ‘황혼’이라고 번역했다면 단순 ‘나이듦’만을 떠올렸을 것이다. 어쨌든 제목이 마음을 끌었다는 얘기다. <br /><br />50대의 잘 나가는 뉴욕타임즈 칼럼리스트인 저자 프랭크 브루니는 보통의 어느날 아침, 한쪽 눈에 이상을 느낀다. 진단 결과는 비동맥류성 전방 허혈성 시신경병증. 쉽게 말하면, 뇌졸중으로 인해 한쪽 눈은 곧 실명할 위기에 처해있고, 나머지 한쪽 눈에도 같은 일이 일어날 확률을 안고 살아야가 한다는 것이다.  때마침 9년 된 연인은 변심하여 떠나고,  아내 먼저 보내고 홀로 남은 아버지는 알츠하이머를 앓는다. 여기까지 읽었을 때, 솔직히 실망스러웠다. ‘아, 극복하는 이야기, 회복탄령성! 클리셰군.’이라고 생각했을 때, 저자는 이렇게 적었다. <br /><br />p40 클리셰로 보이는가. 그렇다면 앞으로 클리셰가 가득한 배가 기다리고 있으니 각오를 단단히 했으면 한다. 아무래도 그것들이 영 거슬릴 것 같으면 배에서 뛰어내리는 편이 나을 것이다. 그러나 클리셰가 클리셰가 된 데에는, 그러니까 어디서나 사용되고 오래가는 자명한 이치가 된 데에는 그만한 이유가 있다는 것을 새롭게 깨달았다. 클리셰는 진실의 아주 가까운 친척이고, 통찰의 보급형 유사품이다. 삶이 시다 못해 쓰디쓴 레몬을 내민대도 당신은 그것으로 레모네이드를 만들 수 있다. 이것은 내가 얻은 큰 배움이었다. 언제나 이웃집 잔디가 더 푸르게 보인다는 것도, 구름의 저편은 늘 은빛으로 빛난다는 것도, 밤은 새벽이 오기 전에 가장 어둡다는 것도 비로소 깨달았다. <br /><br />계속되는 클리셰는 이렇다. 저자는 비슷한 상황에 처한, 혹은 더 어려운 상황에 처한 사람들을 만나 이야기를 듣는다. 사람들이 내보이지 않는 고통 목록을 적어 광고하듯 목에 걸고 다녔으면 좋겠다고 생각한다. 사람들을 나의 불행을 타인의 더 큰 불행과 비교하며 위안을 찾기도 한다. 타인의 고통을 위로하는 마음 안에 얼마간의 안도가 섞이는 것은 대게 표현되지만 않을 뿐이다. 좀 부끄러울 수 있지만 나쁜 방법은 아니다. 저자도 절체정명의 위기 앞에서 뻔하지만 증명된 방법으로 극복을 시도한다. 다른 관점으로 바라보고, 긍정할 요소들을 찾고, 이전에 보지 못했던 것들을 바라보는 연습을 한다. <br /><br />세상에 공짜가 없다고 생각하는 나는, 하나를 얻으면 하나를 내려놔야한다고 생각해왔다. 다 가질 수 없다고 생각했다. 그것이 세상의 이치라고. 의아한 것은 하나를 잃으면 다른 하나를 얻을 수도 있다는 생각은 해보지 못했다는 것이다. 다 가질 수 없는 것이 이치라면, 다 잃는 일도 없다는 것이 당연할텐데 말이다.  무엇인가 떠나간 자리는 비어있는 채로 고정되지 않는다. 사람의 몸이 그렇고, 삶이 그렇고, 인간 관계를 포함한 세상만사가 그렇다. 상실 이후의 삶이 전과 같은 순 없을 것이다. 어쩌면 그 구멍은 평생 메워지지 않을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살아가야 하는 삶에는 비워지는만큼 채워지는 아름다운 것들이 있다. <br /><br />🎗️<br /><br />#상실의기쁨#프랭크브루니#홍정인옮김#웅진지식하우스#thebeatyofdust#FrankBruni#낭독#회복탄력성#신경가소성#완독#북스타그램#책스타그램#낭독스타그램

‘상실’의 ‘기쁨‘이라니. 상실은 극복이나 대처의 대상이 아니었나. 상실해도 ‘괜찮다’가 아니고, 그러니까 상실해서 ‘기쁘다’니. 이 책은 순전히 제목 때문에 장바구니에 담겼다. 원제는 The Beauty of Dusk. 직역하면 황혼의 아름다움이 될텐데, 이런 제목은 매력이 없다. 여기서 'dusk'는 ‘나이듦’과 ‘흐려지는 시야’를 의미하는 중의적인 단어로 쓰였지만, ‘황혼’이라고 번역했다면 단순 ‘나이듦’만을 떠올렸을 것이다. 어쨌든 제목이 마음을 끌었다는 얘기다.

50대의 잘 나가는 뉴욕타임즈 칼럼리스트인 저자 프랭크 브루니는 보통의 어느날 아침, 한쪽 눈에 이상을 느낀다. 진단 결과는 비동맥류성 전방 허혈성 시신경병증. 쉽게 말하면, 뇌졸중으로 인해 한쪽 눈은 곧 실명할 위기에 처해있고, 나머지 한쪽 눈에도 같은 일이 일어날 확률을 안고 살아야가 한다는 것이다. 때마침 9년 된 연인은 변심하여 떠나고, 아내 먼저 보내고 홀로 남은 아버지는 알츠하이머를 앓는다. 여기까지 읽었을 때, 솔직히 실망스러웠다. ‘아, 극복하는 이야기, 회복탄령성! 클리셰군.’이라고 생각했을 때, 저자는 이렇게 적었다.

p40 클리셰로 보이는가. 그렇다면 앞으로 클리셰가 가득한 배가 기다리고 있으니 각오를 단단히 했으면 한다. 아무래도 그것들이 영 거슬릴 것 같으면 배에서 뛰어내리는 편이 나을 것이다. 그러나 클리셰가 클리셰가 된 데에는, 그러니까 어디서나 사용되고 오래가는 자명한 이치가 된 데에는 그만한 이유가 있다는 것을 새롭게 깨달았다. 클리셰는 진실의 아주 가까운 친척이고, 통찰의 보급형 유사품이다. 삶이 시다 못해 쓰디쓴 레몬을 내민대도 당신은 그것으로 레모네이드를 만들 수 있다. 이것은 내가 얻은 큰 배움이었다. 언제나 이웃집 잔디가 더 푸르게 보인다는 것도, 구름의 저편은 늘 은빛으로 빛난다는 것도, 밤은 새벽이 오기 전에 가장 어둡다는 것도 비로소 깨달았다.

계속되는 클리셰는 이렇다. 저자는 비슷한 상황에 처한, 혹은 더 어려운 상황에 처한 사람들을 만나 이야기를 듣는다. 사람들이 내보이지 않는 고통 목록을 적어 광고하듯 목에 걸고 다녔으면 좋겠다고 생각한다. 사람들을 나의 불행을 타인의 더 큰 불행과 비교하며 위안을 찾기도 한다. 타인의 고통을 위로하는 마음 안에 얼마간의 안도가 섞이는 것은 대게 표현되지만 않을 뿐이다. 좀 부끄러울 수 있지만 나쁜 방법은 아니다. 저자도 절체정명의 위기 앞에서 뻔하지만 증명된 방법으로 극복을 시도한다. 다른 관점으로 바라보고, 긍정할 요소들을 찾고, 이전에 보지 못했던 것들을 바라보는 연습을 한다.

세상에 공짜가 없다고 생각하는 나는, 하나를 얻으면 하나를 내려놔야한다고 생각해왔다. 다 가질 수 없다고 생각했다. 그것이 세상의 이치라고. 의아한 것은 하나를 잃으면 다른 하나를 얻을 수도 있다는 생각은 해보지 못했다는 것이다. 다 가질 수 없는 것이 이치라면, 다 잃는 일도 없다는 것이 당연할텐데 말이다. 무엇인가 떠나간 자리는 비어있는 채로 고정되지 않는다. 사람의 몸이 그렇고, 삶이 그렇고, 인간 관계를 포함한 세상만사가 그렇다. 상실 이후의 삶이 전과 같은 순 없을 것이다. 어쩌면 그 구멍은 평생 메워지지 않을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살아가야 하는 삶에는 비워지는만큼 채워지는 아름다운 것들이 있다.

🎗️

#상실의기쁨#프랭크브루니#홍정인옮김#웅진지식하우스 #thebeatyofdust #FrankBruni#낭독#회복탄력성#신경가소성#완독#북스타그램#책스타그램#낭독스타그램

4/16/2023, 5:47:36 AM